비 오는 밤, 세상빛과 설메아리가 투명 우산을 함께 쓰고 젖은 골목을 걷는 모습.
에피소드

프롤로그 · 첫 자기소개

노래가 끝난 뒤에도

비 오는 밤, 우산 하나를 나눠 쓴 두 자매.

작은 공연 일을 마친 밤, 세상빛과 설메아리는 휴대전화로 첫 자기소개를 찍는다. 막차를 기다리며 영상을 돌려 보던 두 사람은 빗소리 사이에 섞인 낯선 세 음을 발견한다.

박수가 멎자 나는 휴대전화 화면부터 확인했다. 막차까지 십구 분 남아 있었다.

마지막 관객이 문을 나갔다. 접히는 의자 소리와 젖은 신발 끄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마이크 전원을 끄고 우리가 쓴 케이블을 가방에 넣었다. 서둘러 감을수록 케이블 끝이 자꾸 풀려 나왔다.

설메아리는 무대 끝에 걸터앉아 발뒤꿈치로 바닥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서 방금 부른 후렴을 작게 흥얼거렸다.

“그거 아까부터 계속 하네.”

“뭐?”

“후렴.”

설메아리는 자기도 몰랐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에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소리 안 내면 괜찮지?”

“발이 계속 박자 타고 있잖아.”

“언니는 그런 것도 세고 있어?”

“응. 막차까지 남은 시간도.”

설메아리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앞줄에 있던 사람 봤어?”

“눈 비비던 사람?”

“울었어.”

“렌즈 때문일 수도 있지.”

“울면서 렌즈가 불편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대답 대신 케이블을 가방 안으로 밀었다. 그런데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 설메아리가 다가와 삐져나온 고리를 집었다.

“반대로 감았어.”

“알아.”

“알면서 왜 계속 눌러?”

설메아리가 케이블을 한 바퀴 풀어 반대 방향으로 감자 이번에는 가방 안에 쏙 들어갔다.

“막차 급한 사람이 일을 두 번 하네.”

“오늘 한 번 실수한 거야.”

“아까 언니 물병도 찾았잖아.”

“그건 네가 옮겼으니까.”

설메아리는 말없이 내 왼손을 가리켰다. 찾던 물병이 거기에 들려 있었다. 나는 슬쩍 가방 옆에 내려놓았다.

“이 얘기는 하지 마.”

“벌써 늦었어.”

관객이 떠난 작은 공연장에서 세상빛과 설메아리가 장비 가방 위에 휴대전화를 세우고 첫 자기소개 영상을 찍는 모습.
공연이 끝난 뒤, 두 자매가 휴대전화로 첫 자기소개를 찍었다.

설메아리는 휴대전화를 닫힌 장비 가방 위에 세웠다. 화면 속 우리는 공연을 끝낸 가수보다 비를 맞고 급히 들어온 사람들에 가까웠다. 설메아리의 앞머리는 한쪽으로 붙어 있었고 내 재킷 깃도 비뚤어져 있었다.

“지금 찍게?”

“오늘 영상 하나 남기기로 했잖아.”

“이 꼴로?”

“조명이 알아서 해 주겠지.”

설메아리는 화면을 보며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러고는 내 재킷 깃도 바로 세웠다.

“너나 잘해.”

“나는 원래 이래.”

“나도 그래.”

나는 화면을 보며 휴대전화 각도를 다시 맞췄다.

“왜?”

“천장이 너무 많이 나와서.”

“턱 때문 아니고?”

“시작한다.”

우리는 함께 노래할 때 세상빛과 설메아리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 첫 문장까지는 외워 뒀다.

“안녕하세요. 저는 세상빛이고…….”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있던 문장이 화면 속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사라졌다.

설메아리가 기다리다 못해 옆에서 물었다.

“그리고?”

“잠깐만.”

“언니 귀 빨개졌어.”

“조명 때문이야.”

“조명은 흰색인데.”

나는 녹화를 끄려 했지만 설메아리가 휴대전화를 자기 쪽으로 밀었다.

“다시. 이번에는 내가 할게.”

두 번째 녹화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자매고, 공연도 같이 다녀요. 저는 설메아리, 이쪽은 언니 세상빛이에요.”

“가수 아르바이트라고 해야 정확해.”

“굳이 아르바이트를 붙여야 돼?”

“사실이잖아.”

“꿈이 없는 사람들처럼 들리잖아.”

“꿈은 있고, 오늘은 막차도 있고.”

설메아리는 웃다가 내가 카메라 옆 콘센트를 힐끔거리는 걸 알아챘다.

“언니는 지금도 카메라보다 플러그를 보고 있고요.”

“하나 남았어.”

“언니는 늘 저런 식으로 말을 끝내요.”

“늘은 아니야.”

“방금도 그랬잖아요.”

그 뒤로는 소개보다 서로 놀리는 데 정신이 팔렸다. 설메아리는 내가 낮게 낸 음을 흉내 냈고, 나는 설메아리가 박자를 놓친 순간을 들춰냈다. 피곤해서인지 우리 둘 다 반응이 한 박자씩 늦었다. 서로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웃음이 터졌다.

“다시 찍자.”

내가 말하자 설메아리가 녹화 화면을 확인했다.

“왜? 이게 제일 우리 같은데.”

“소개가 중간에 끊겼잖아.”

“이름도 말했고, 자매인 것도 말했고, 노래하는 것도 말했어. 됐지.”

“재킷 깃도 다시 내려갔어.”

설메아리는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웃었다.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거지?”

긴 머리의 설메아리가 앞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짧은 웨이브 머리의 세상빛이 뒤에서 웃으며 ‘반가워!’라고 인사하는 이모티콘.
세상빛과 설메아리가 함께 건네는 첫인사.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장비 가방을 들었다.

“다음에도 찍자.”

“무대마다?”

“아니. 그냥 기억하고 싶은 날에만. 말로 다 못 하겠으면 노래도 같이 녹음하고.”

“오늘 부른 노래도 아직 안 들어 봤어.”

“그럼 집에 가서 같이 듣자.”

밖으로 나오자 빗소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처마 아래 접힌 입간판 뒤에 크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설메아리는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내밀거나 부르지 않고 고양이와 눈높이만 맞췄다. 고양이도 도망가지 않고 잠깐 이쪽을 바라봤다.

“가까이 가지 마. 놀라.”

“알아. 눈높이만.”

설메아리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먼저 일어났다. 고양이는 처마 아래 그대로 남았다.

비 오는 밤, 처마 아래 몸을 둥글게 만 크림색 고양이와 두어 걸음 떨어져 눈높이를 맞추는 설메아리, 그 곁에 선 세상빛.
비를 피하던 고양이와 처음 눈이 마주친 밤.

나는 투명 우산을 펴서 설메아리 쪽으로 기울였다. 설메아리는 손잡이를 잡아 우산을 우리 사이로 되돌려 놓았다.

“네 쪽 젖어.”

“언니 왼쪽 어깨부터 봐.”

고개를 돌려 보니 내 어깨가 이미 짙게 젖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내 쪽 젖은 건 보면서 자기 어깨는 모르네.”

“감기 걸리면 다음 일 못 해.”

“언니도 노래하잖아.”

설메아리는 우산을 다시 가운데에 맞췄다.

정류장에 도착한 뒤 설메아리는 영상 끝부분을 자르려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우리가 말을 멈춘 뒤에도 몇 초가 더 녹화되어 있었다. 가방을 여닫는 소리와 의자 다리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 문밖의 빗소리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짧은 허밍 같은 소리가 섞여 있었다. 세 음뿐이었다.

“이거 언니야?”

“아니. 너 아니었어?”

설메아리는 한 번 더 재생했다. 빗소리 사이의 세 음만으로는 누가 낸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끝을 자르면 없어지겠네.”

내 말에 설메아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자.”

“왜?”

“아직 뭔지 모르잖아.”

화면 속 비뚤어진 재킷 깃이 자꾸 눈에 밟혔지만,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설메아리는 편집 화면을 닫았다.

버스가 도착하자 우리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버스 안에서 설메아리가 낮게 말했다.

“집에 가서 한 번 더 들어 보자.”

나는 젖은 재킷 깃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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