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공연장 앞 골목에서 크림색 고양이를 다시 만난 세상빛과 설메아리.
에피소드

시즌 1 · 3화

너를 부를 이름

공연을 마친 자매는 비 오던 밤의 고양이를 다시 만난다. 이름을 불러 보는데, 고양이는 설메아리의 손에 든 명함만 보고 있다.

자매가 고양이를 만나기 전이었다.

민트빛 알에 금이 갔다. 틈으로 흰 앞발 하나가 나왔다.

민트빛 알 껍데기에서 몸을 내민 크림색 고양이. 머리 위에 작은 주황빛 장식과 초록 잎 두 장이 있다.

작은 고양이는 껍데기 위에 두 발을 올리고 가슴을 폈다. 껍데기가 굴렀다. 고양이도 한 뼘쯤 옆으로 굴렀다.

잠깐 그대로 있던 고양이가 일어섰다. 머리 위 주황빛 장식과 초록 잎 두 장이 뒤늦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껍데기를 피해 걸었다.


공연장 문을 나서다 나는 언니의 가방 끈을 잡았다.

“언니, 저기.”

접힌 입간판 뒤로 하얀 꼬리가 나와 있었다. 비 오던 밤, 우리를 바라보던 고양이였다. 오늘은 바닥이 말라 있었다.

“또 있네.”

두 팔을 벌려 인사하는 설메아리와 뒤에서 웃는 세상빛.

우리는 두어 걸음 떨어져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가 하품을 하자 머리 위의 초록 잎이 흔들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를 봤다. 고양이도 눈을 가늘게 떴다.

“나 기억하나 봐.”

고양이는 눈을 마저 감았다.

“졸린 것 같은데.”

“기억하면서 졸릴 수도 있지.”

언니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방 지퍼가 열리자 고양이의 귀가 섰다. 언니는 다음 연습 시간을 확인하려고 작은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펼치자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둔 명함 한 장이 무릎 위로 미끄러졌다.

“그거 아직 있었어?”

지난번 공연 때 받은 명함이었다. 한쪽 귀퉁이가 접혀 있었고, 뒷면에는 내가 연필로 쓴 ‘끝나고 영상 찍기’가 남아 있었다.

“여기 끼워 놓고 잊었네.”

“우리 자기소개하다 웃은 날이잖아.”

“나는 말이 안 나온 것부터 생각나는데.”

언니가 접힌 귀퉁이를 손톱으로 폈다. 눌린 자국은 남았다.

“그래도 그 영상 안 지웠잖아.”

“네가 그게 제일 우리 같다고 했잖아.”

나는 명함을 받아 뒤집어 봤다.

“지금은 안 지울 거지?”

“응.”

언니는 무릎 위에서 흘러내리려는 수첩을 고쳐 잡았다.

고양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리 얼굴보다 내 손을 오래 보았다.

“얘도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명함을 무릎 가까이 내렸다.

“이음이 어때?”

“왜 이음이야?”

“얘를 또 보니까 그날 얘기도 이어서 하잖아.”

고양이는 앞발을 핥았다.

“이음아.”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언니를 봤다. 언니는 내 손을 보고 있었다.

“명함 좀 옮겨 봐.”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고양이도 오른쪽을 봤다. 왼쪽으로 옮기니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이름 알아들은 줄 알았네.”

턱에 손을 댄 세상빛과 두 손을 펴서 어리둥절해하는 설메아리.

언니가 웃었다. 나는 명함을 수첩에 도로 끼우려고 손을 뻗었다.

고양이가 코를 가져왔다. 냄새만 맡는 줄 알았다. 작은 입이 접힌 귀퉁이를 덥석 물었다.

“그건 먹는 거 아니야.”

얼떨결에 명함을 놓쳤다. 고양이는 종이를 문 채 입간판 뒤로 몸을 돌렸다.

“잠깐만.”

언니가 수첩을 덮는 사이 나는 입간판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는 바로 뒤에 있었다. 명함은 입에도, 발밑에도 없었다.

“떨어뜨렸나?”

언니는 휴대전화 불빛을 바닥에 비췄다. 나는 입간판 밑을 살폈다. 고양이가 내가 비켜 준 자리에 앉았다.


고양이가 앞발을 내려다봤다.

발밑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공연장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왔다.

짙은 재킷을 입은 언니가 가방을 고쳐 들었다. 동생은 고양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았다.

“가까이 가지 마. 놀라.”

“알아. 눈높이만.”

동생은 손을 뻗지 않았다. 고양이가 나올 자리도 남겨 두었다.

비 오던 밤, 처마 아래 크림색 고양이와 거리를 두고 앉은 설메아리. 세상빛은 접은 투명 우산과 가방을 들고 곁에 서 있다.

고양이는 앞발 하나를 들었다.

빗소리가 끊겼다.


“이음아. 거기 잠깐만 비켜 줄래?”

고양이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가 옆을 가리키자 아주 조금 움직였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종이가 없었다.

“그만큼 말고.”

고양이가 다시 조금 움직였다.

언니가 웃으며 고양이 옆을 비췄다. 나도 웃음이 났다. 명함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얘는 어디 갔는지 아는 것 같지 않아?”

“아까는 널 기억한다며.”

나는 고양이 앞에 손을 내려놓았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거고.”

손을 그대로 두고 기다렸다. 고양이가 다가와 내 손끝에 코를 댔다.

이번에는 내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